길은정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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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 작성일05-01-07 10:16 조회120,92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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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정 공식홈페이지 (kileunjung.starnstar.net) 자유게시판 추모글 중에서-
당신을 뒤 따라 가는
눈 덮인 길 위엔
수 많은 발자국이 있을 법한데
휠체어 바퀴 자국, 간혹 끌린듯한 기타 자국만 있습니다.
누군가 분명 당신을 밀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누구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누이도, 오라버니도, 친지까지도
당신의 힘든 인생의 짐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암에 걸렸을 때의 고통을 참는 것은
마치 서서히 죽어가는 인생의 여정만큼 고달픈 것이라 하셨죠?
은정님
지금껏 홀로 잘 인내 하셨습니다.
모든 걸 잊을 법도 한데 환한 미소와 파란 기타 선율의 예술혼,
진정 우리에겐 인생의 희망입니다.
비록 인간은 죽음 앞에선 연약한 갈대 같지만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당신을 보니
구차한 삶이 더욱 부끄러워 짐을 배웁니다.
은정님
그대 가는 곳이
병마도 없고 고통도 없고
노래와 웃음
아! 아마도 행복 가득한 곳이겠죠.
갈 때
못 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처럼
못 다 핀 사랑이야기에 눈물 적시게 됩니다.
간다고 아주 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당신이 먼저 간 인생 길을 따라서
이젠 저도 당신 닮은 누군가의 휠체어를 밀어 드리고 싶습니다.
한마음으로 우리들의 인생의 고통을 나누고 싶습니다.
다시 눈이 와 모든 발자국이 사라진대도
영원한 행복을 나눌 때까지
-길은정 공식홈페이지 (kileunjung.starnstar.net) 자유게시판 <하늘사랑>이쓴 추모글 -
파란
사랑 파랑 기타
세상이 춥다며
오그라들던 날
파랑 사랑 그리던
파란 하늘이 되었구나
꿈에도 그리던
파랑 사랑을 만났으리라
사무친 미움자락
부질없다 헤쳐 풀며
울면 잠든 베개 닢
한 장의 추억이 되던 날
한 칸 세상나들이
참으로 행복했었노라며
사랑만 하며
잘들 살라
전해달라면서
아픈 손
그리운
마음 가득 흔들며
파란 기타의 선율로
찬 세상 아름답게 데웠다.
기약 없는 약속
하늘에 쓴 일기장의 숨결
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랑으로만 물들던
고운 숨 멎던 날
눈부시도록 하늘이 파랗다.
길은정, 9일 오전 눈물 속의 발인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지난 7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길은정이 이승과의 인연을 끝내고 경기도 벽제 승화원으로 향했다.
길은정의 발인이 9일 오전 8시 삼성 서울병원에서 있었다.
운구 행렬 맨 앞에는 오빠 길연하 씨가 영정을 들었고, 길은정이 진행했던 원음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래 하나 추억 둘\'(서울 89.7㎒)에서 `라이브 우체통\' 코너를 함께 진행했던 우종민 씨와 팬클럽 회원, 후배 가수들이 영구를 들고 그 뒤를 이었다.
길은정의 영구가 보이자 언니 길선옥 씨는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흐느껴 길은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발인 직전인 오전 7시 40분께 오빠 길연하 씨는 빈소에서 길은정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세상에서 유일한 파란색 기타를 챙기며 \"은정이 가장 아꼈던 기타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운구 행렬은 서울 여의도를 거쳐 오전 10시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한 뒤 오후 1시 일산 청아공원에서 추모식을 연 후 안치된다.
청아공원 추모식에서는 길은정이 타계 전날인 6일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진행했던 `노래 하나 추억 둘\' 방송 당시의 육성을 10분 분량으로 편집해 틀기로 했다. 또 그룹 한마음의 멤버 양하영이 길은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사연을 모아 낭독한다.
길은정의 생전에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방송작가 민경미 씨는 \"`노래 하나 추억 둘\' PD와 작가들이 8일 밤을 새서 언니의 방송 육성을 편집했다. 모두들 갑작스런 죽음에 비통해 했다\"고 밝혔다.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데뷔해 수많은 히트곡을 낳았던 가수이자 DJ 길은정은 암투병 끝에 결국 세상과 이별하게 됐다. 길은정은 갔지만 사랑했던 모든 팬들은 그의 노래와 목소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mimi@yna.co.kr
암투병 가수 길은정씨 별세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암 투병 중이던 가수 길은정(44) 씨가 7일 오후 7시30분께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그의 매니저 구자형 씨가 이날 말했다.
직장암 투병 중이던 길은정 씨는 최근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면서 병원에 서 길어야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길씨는 이날 오전 구토 증세가 심해지다가 오후 7시께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30분쯤 지나 숨을 거뒀다고 길씨의 유족들이 밝혔다.
그는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6일까지도 원음방송(서울 89.7㎒)에서 매일 생방송 `길은정의 노래하나 추억둘\'을 진행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유족들은 \"오늘까지도 방송을 하겠다고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길씨는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가수 활동과 함께 방송 MC와 라디오 DJ로서도 폭넓은 연예 활동을 했다.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를 비롯해 `가위바위보\', `가요톱텐\', EBS의 `만들어 볼까요\', MBC `정오의 희망곡\' 등 수많은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96년 암 투병을 시작한 길씨는 지난해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면서 말기암 환자로서 시한부 삶을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보 `만파식적\'을 내놓고 최근까지 방송을 진행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발휘해 노래를 들려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수 편승엽과의 이른바 `사기결혼\'에 관한 명예훼손 논란으로 법적 분쟁을 겪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길연하 씨 등 오빠 3명과 언니가 있다.
길씨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다.
jsa@yna.co.kr
마지막까지 방송에 대한 열정 과시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정직한 낭만주의자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생 소녀같던 가수이자 방송인 길은정씨가 7일 오후 7시 30분께 분당 자택에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길씨는 지난 11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렇게 기억해 달라고 했다.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아 주기도 해야 하는 데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았어요. 저같은 사람이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었어요\"라고 말하던 그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는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MC와 DJ 등 방송인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뽀뽀뽀\'를 비롯해 `가요톱텐, `영일레븐\', `TV쇼 네트워크\', EBS `만들어 볼까 요\', MBC FM `정오의 희망곡\' 등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표 MC로서 웬만한 인기 프 로그램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과 이별하기 전날까지 이를 악물어가며 생방송을 한 원음 방송의 `노래하나 추억둘\'이 가장 각별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함께 하게 됐다.
생명이 사그러가던 중에도 분당에서 직접 운전까지 해 가면서 흑석동의 원음방 송으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방송진행을 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가장 사랑하는 방송이죠.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거든요. 남들 알아주는 큰 방 송사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청취자들께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거든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던 그였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발휘 해 노래를 들려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1996년 직장암과 투병을 시작했던 길은정은 2002년 노래 시집을 낼 때만 해도 임파선으로만 전이가 되어서 잘만 관리하면 10-20년까지도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 다고 했다. 최근에는 림프와 혈류를 통해 암세포가 골반과 척추에 완전히 침투해 오 른쪽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2년 가을부터 전 남편 편승엽과 이른바 사기결혼과 관련된 명예훼 손 등을 놓고 법적 분쟁을 겪으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징역 7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길씨는 항소했으나 이후 항소를 취하해 모든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는 \"이제 와서 이것을 보상 받을 수는 없겠지만요. 남은 한달이든 두달이든 알차게 쓸 겁니다. 이젠 원하는 것을 생이 끝나기 전에 원없이 다 해야겠다는 생각 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가수와 진행자로서 뿐만 아니라 에세이집 `그럼에도 행복하다\'와 노래 시 집, 귀로듣는 책(오디오북) 등의 저자로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끝까지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라고 했다.
\"한번 무너지면 끝장이 날 것 같아서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어요. 그렇지만 죽 음이 두려운 건 아니예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맞이할 수 있을 것같 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옥죄어 온 병마와 싸워 가면서 평소 해야할 일들을 차 근차근 준비해 왔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가수로서 진행자로서 길씨를 아끼던 팬들 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길은정 이름 석자는 죽음 앞에 초연하면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던 대단한 사람으로 오래 도록 기억될 것이다.
jsa@yna.co.kr
길은정 타계, 인터넷에 추모 물결 2005/01/07 22:36 송고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가수 겸 MC 길은정씨가 암투병 끝에 7일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공식 팬카페인 `길은정 소중한 사람\'(kileunjung.starnstar.net)에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추모글이 쏟아졌다.
팬 카페 뿐만 아니라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수백 건의 글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팬들은 공식 팬카페 `자유 게시판\'으로 몰려와 \"하늘 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 좋은 곳으로 가세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등의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특히 팬들의 가슴을 찡하게 한 것은 `길은정 일기\'. 사망 3일 전인 4일 오전 길은정이 쓴 `내가 좋아하는 블루\'라는 제목의 글은 시한부 인생을 구슬프게 읊었다.
길은정은 \"파란색으로 칠을 한 기타를 갖고 싶었다. 기타 제조회사가 파란색 기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여름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뤄졌는데 불과 몇 개월 후 난 걸을 수 없어졌고. 이미 욕창까지 생겨버린 정도였다\"고 했다.
또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요즘은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려워졌다. 의사의 말로는 암세포가 내 두뇌로 옮겨가 시신경 어느 부분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도 했다.
팬들은 \"길은정의 예쁜 미소를 오래도록 간직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mimi@yna.co.kr
길은정의 마지막 일기-파란색 기타>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길은정은 사망 3일전인 지난 4일 오전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kileunjung.starnstar.net) `길은정의 일기\'에 마지막 글을 남겼다. 작성일자는 전날(3일)로 기록된 길은정의 마지막 일기 전문을 소개한다.
제목 : 2005. 1. 3. 내가 좋아하는 블루
파랑이라는 색깔에서 파생된 색이라면
나는 그냥 좋다.
물론 \'그냥\' 이라는 답은 없어서
깊이 생각하고 따지고 들어가보면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냥\'이라고....
내게는 기타가 2대 있는데
(뭐... 음악을 전문으로하고 기타를 전문적으로 치는 사람들에게는
기타 20여대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 걸....)
그 두 대 모두 원목 색깔 그대로를 살린 기타다.
물론 어쿠스틱은 원목의 빛깔과 나무 결을 그대로 살린 기타 중에서
훨씬 더 좋은 기타를 찾기 쉽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파란색으로 칠을 한 기타를 갖고 싶었다.
마침,
국내 기타제조회사인 \'콜트Cort\'에서, 나만의 이니셜이 새겨진
파란색 기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나는 그분께 \'정말이냐?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사실이냐?\'고
수도 없이 물었고
너무 좋아 폴짝 폴짝 그자리에서 뛰기도 했고
뱅글뱅글 돌기도 했었다.
나는 \'록시\'에서나 다른 공연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함께 무대에 서면
반드시 그 파란색 기타를 메고
파랑보다 더 싱그럽게 연주하고 노래하리라 마음 먹었다.
.......
그 약속은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이루어졌고
불과 몇 개월 후
나는 걸을 수 없어졌고
휠체어에서만 생활할 수 밖에 없어졌다.
그래서 이미 욕창까지 생겨버린 정도였다.
그리고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열린 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을 빼곤
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파란색 기타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라고 가슴 설레던 그 날.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송국으로 연락이왔다.
그 때 약속했던 기타가 다 만들어졌으니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볼이 아리도록 추운 날.
달마팔자 님(지금은 폐쇄해 버린 길은정 행복카페의 회원 닉네임)이
산타클로스처럼,
여성용으로 작고 예쁜 모양에
금색으로 영문 \'길은정\'이라는 이름을 새긴
파란색 기타를 들고 찾아오신 것이었다.
파란색으로 칠을 했지만
원목의 결을 그대로 살려,
얼마나 이 기타를 만드는데 공을 들였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정작 잊고 있었던
내 이름이 새겨진,
나 만의 파란색 기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기타......
그 기타를 쓰다듬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울음이었다.
잊지않고 나 만의 기타를 만들고 있었던 \'콜트 Cort\' 기타회사 직원들과
달마팔자님의 선의를 생각하니
그 어떤 말로도 고맙다는 표현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기타를 쓰다듬다가 자리를 정리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날을 새도 모를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열린 음악회에 나갔을 때 연주할 수 있었을 걸\'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꺼내보고 또 꺼내보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소리를 내보고 줄을 맞추고....
휠체어에 앉아 기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무리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길은정의 노래하나 추억 둘 송년특집. 라이브 우체국\'을
생방송으로 진행할 때
그 파란색 기타로 \'호텔 캘리포니아\' 를 연주했다.
기타 폭이 좁아, 휠체어에서 조금 앞으로 자세를 빼어 앉으면
연주할 수 있는 모델이라
나는 내 사랑을 흠뻑 담아 기타 줄을 퉁겼다.
행복한 2시간 동안의 생방송이 순간처럼 흘러갔다.
그렇게 파란색, 내 이름이 새겨진, 나 만의 기타와 나는 하나가 된 듯 했다.
아이처럼 자랑하고 싶어 자꾸만 꺼내어 보고 있다.
이젠 기타를 메고 앉을 무대도 없으면서......
....... 요즘은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려워졌다.
의사의 말로는
암세포가 내 두뇌로 옮겨가
시신경 어느 부분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은 내 마음과 정신력에 달렸을 뿐,
병원에서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엄청난 말기 암의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몰핀\' 주사를 놓아주고
역시 \'마약류\'로 분류되는 진통제를 처방해 주는 일 뿐이다.
내가 방송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정말 아픈 것 맞냐고 묻는 이도 있는 걸.....
이제 모든 것은 내 정신력에 달려있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도록 노력해야 할텐데.....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기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
.........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파랑색처럼 순수하고 맑으며
천재성이 빛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같은 사람.
당신을 뒤 따라 가는
눈 덮인 길 위엔
수 많은 발자국이 있을 법한데
휠체어 바퀴 자국, 간혹 끌린듯한 기타 자국만 있습니다.
누군가 분명 당신을 밀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누구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누이도, 오라버니도, 친지까지도
당신의 힘든 인생의 짐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암에 걸렸을 때의 고통을 참는 것은
마치 서서히 죽어가는 인생의 여정만큼 고달픈 것이라 하셨죠?
은정님
지금껏 홀로 잘 인내 하셨습니다.
모든 걸 잊을 법도 한데 환한 미소와 파란 기타 선율의 예술혼,
진정 우리에겐 인생의 희망입니다.
비록 인간은 죽음 앞에선 연약한 갈대 같지만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당신을 보니
구차한 삶이 더욱 부끄러워 짐을 배웁니다.
은정님
그대 가는 곳이
병마도 없고 고통도 없고
노래와 웃음
아! 아마도 행복 가득한 곳이겠죠.
갈 때
못 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처럼
못 다 핀 사랑이야기에 눈물 적시게 됩니다.
간다고 아주 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당신이 먼저 간 인생 길을 따라서
이젠 저도 당신 닮은 누군가의 휠체어를 밀어 드리고 싶습니다.
한마음으로 우리들의 인생의 고통을 나누고 싶습니다.
다시 눈이 와 모든 발자국이 사라진대도
영원한 행복을 나눌 때까지
-길은정 공식홈페이지 (kileunjung.starnstar.net) 자유게시판 <하늘사랑>이쓴 추모글 -
파란
사랑 파랑 기타
세상이 춥다며
오그라들던 날
파랑 사랑 그리던
파란 하늘이 되었구나
꿈에도 그리던
파랑 사랑을 만났으리라
사무친 미움자락
부질없다 헤쳐 풀며
울면 잠든 베개 닢
한 장의 추억이 되던 날
한 칸 세상나들이
참으로 행복했었노라며
사랑만 하며
잘들 살라
전해달라면서
아픈 손
그리운
마음 가득 흔들며
파란 기타의 선율로
찬 세상 아름답게 데웠다.
기약 없는 약속
하늘에 쓴 일기장의 숨결
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랑으로만 물들던
고운 숨 멎던 날
눈부시도록 하늘이 파랗다.
길은정, 9일 오전 눈물 속의 발인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지난 7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길은정이 이승과의 인연을 끝내고 경기도 벽제 승화원으로 향했다.
길은정의 발인이 9일 오전 8시 삼성 서울병원에서 있었다.
운구 행렬 맨 앞에는 오빠 길연하 씨가 영정을 들었고, 길은정이 진행했던 원음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래 하나 추억 둘\'(서울 89.7㎒)에서 `라이브 우체통\' 코너를 함께 진행했던 우종민 씨와 팬클럽 회원, 후배 가수들이 영구를 들고 그 뒤를 이었다.
길은정의 영구가 보이자 언니 길선옥 씨는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흐느껴 길은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발인 직전인 오전 7시 40분께 오빠 길연하 씨는 빈소에서 길은정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세상에서 유일한 파란색 기타를 챙기며 \"은정이 가장 아꼈던 기타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운구 행렬은 서울 여의도를 거쳐 오전 10시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한 뒤 오후 1시 일산 청아공원에서 추모식을 연 후 안치된다.
청아공원 추모식에서는 길은정이 타계 전날인 6일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진행했던 `노래 하나 추억 둘\' 방송 당시의 육성을 10분 분량으로 편집해 틀기로 했다. 또 그룹 한마음의 멤버 양하영이 길은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사연을 모아 낭독한다.
길은정의 생전에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방송작가 민경미 씨는 \"`노래 하나 추억 둘\' PD와 작가들이 8일 밤을 새서 언니의 방송 육성을 편집했다. 모두들 갑작스런 죽음에 비통해 했다\"고 밝혔다.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데뷔해 수많은 히트곡을 낳았던 가수이자 DJ 길은정은 암투병 끝에 결국 세상과 이별하게 됐다. 길은정은 갔지만 사랑했던 모든 팬들은 그의 노래와 목소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mimi@yna.co.kr
암투병 가수 길은정씨 별세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암 투병 중이던 가수 길은정(44) 씨가 7일 오후 7시30분께 경기 성남시 분당 자택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그의 매니저 구자형 씨가 이날 말했다.
직장암 투병 중이던 길은정 씨는 최근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면서 병원에 서 길어야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길씨는 이날 오전 구토 증세가 심해지다가 오후 7시께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30분쯤 지나 숨을 거뒀다고 길씨의 유족들이 밝혔다.
그는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6일까지도 원음방송(서울 89.7㎒)에서 매일 생방송 `길은정의 노래하나 추억둘\'을 진행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유족들은 \"오늘까지도 방송을 하겠다고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길씨는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가수 활동과 함께 방송 MC와 라디오 DJ로서도 폭넓은 연예 활동을 했다.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를 비롯해 `가위바위보\', `가요톱텐\', EBS의 `만들어 볼까요\', MBC `정오의 희망곡\' 등 수많은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96년 암 투병을 시작한 길씨는 지난해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면서 말기암 환자로서 시한부 삶을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보 `만파식적\'을 내놓고 최근까지 방송을 진행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발휘해 노래를 들려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수 편승엽과의 이른바 `사기결혼\'에 관한 명예훼손 논란으로 법적 분쟁을 겪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길연하 씨 등 오빠 3명과 언니가 있다.
길씨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다.
jsa@yna.co.kr
마지막까지 방송에 대한 열정 과시
(서울=연합뉴스) 홍제성 기자 = \"정직한 낭만주의자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생 소녀같던 가수이자 방송인 길은정씨가 7일 오후 7시 30분께 분당 자택에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길씨는 지난 11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렇게 기억해 달라고 했다.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아 주기도 해야 하는 데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았어요. 저같은 사람이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었어요\"라고 말하던 그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는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MC와 DJ 등 방송인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뽀뽀뽀\'를 비롯해 `가요톱텐, `영일레븐\', `TV쇼 네트워크\', EBS `만들어 볼까 요\', MBC FM `정오의 희망곡\' 등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표 MC로서 웬만한 인기 프 로그램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과 이별하기 전날까지 이를 악물어가며 생방송을 한 원음 방송의 `노래하나 추억둘\'이 가장 각별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함께 하게 됐다.
생명이 사그러가던 중에도 분당에서 직접 운전까지 해 가면서 흑석동의 원음방 송으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방송진행을 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가장 사랑하는 방송이죠.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거든요. 남들 알아주는 큰 방 송사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청취자들께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거든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라던 그였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KBS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발휘 해 노래를 들려줘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1996년 직장암과 투병을 시작했던 길은정은 2002년 노래 시집을 낼 때만 해도 임파선으로만 전이가 되어서 잘만 관리하면 10-20년까지도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 다고 했다. 최근에는 림프와 혈류를 통해 암세포가 골반과 척추에 완전히 침투해 오 른쪽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2년 가을부터 전 남편 편승엽과 이른바 사기결혼과 관련된 명예훼 손 등을 놓고 법적 분쟁을 겪으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징역 7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길씨는 항소했으나 이후 항소를 취하해 모든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는 \"이제 와서 이것을 보상 받을 수는 없겠지만요. 남은 한달이든 두달이든 알차게 쓸 겁니다. 이젠 원하는 것을 생이 끝나기 전에 원없이 다 해야겠다는 생각 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가수와 진행자로서 뿐만 아니라 에세이집 `그럼에도 행복하다\'와 노래 시 집, 귀로듣는 책(오디오북) 등의 저자로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끝까지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라고 했다.
\"한번 무너지면 끝장이 날 것 같아서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어요. 그렇지만 죽 음이 두려운 건 아니예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맞이할 수 있을 것같 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옥죄어 온 병마와 싸워 가면서 평소 해야할 일들을 차 근차근 준비해 왔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가수로서 진행자로서 길씨를 아끼던 팬들 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길은정 이름 석자는 죽음 앞에 초연하면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던 대단한 사람으로 오래 도록 기억될 것이다.
jsa@yna.co.kr
길은정 타계, 인터넷에 추모 물결 2005/01/07 22:36 송고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가수 겸 MC 길은정씨가 암투병 끝에 7일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공식 팬카페인 `길은정 소중한 사람\'(kileunjung.starnstar.net)에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추모글이 쏟아졌다.
팬 카페 뿐만 아니라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수백 건의 글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팬들은 공식 팬카페 `자유 게시판\'으로 몰려와 \"하늘 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 좋은 곳으로 가세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는 등의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특히 팬들의 가슴을 찡하게 한 것은 `길은정 일기\'. 사망 3일 전인 4일 오전 길은정이 쓴 `내가 좋아하는 블루\'라는 제목의 글은 시한부 인생을 구슬프게 읊었다.
길은정은 \"파란색으로 칠을 한 기타를 갖고 싶었다. 기타 제조회사가 파란색 기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여름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뤄졌는데 불과 몇 개월 후 난 걸을 수 없어졌고. 이미 욕창까지 생겨버린 정도였다\"고 했다.
또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요즘은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려워졌다. 의사의 말로는 암세포가 내 두뇌로 옮겨가 시신경 어느 부분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도 했다.
팬들은 \"길은정의 예쁜 미소를 오래도록 간직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mimi@yna.co.kr
길은정의 마지막 일기-파란색 기타>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길은정은 사망 3일전인 지난 4일 오전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kileunjung.starnstar.net) `길은정의 일기\'에 마지막 글을 남겼다. 작성일자는 전날(3일)로 기록된 길은정의 마지막 일기 전문을 소개한다.
제목 : 2005. 1. 3. 내가 좋아하는 블루
파랑이라는 색깔에서 파생된 색이라면
나는 그냥 좋다.
물론 \'그냥\' 이라는 답은 없어서
깊이 생각하고 따지고 들어가보면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냥\'이라고....
내게는 기타가 2대 있는데
(뭐... 음악을 전문으로하고 기타를 전문적으로 치는 사람들에게는
기타 20여대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 걸....)
그 두 대 모두 원목 색깔 그대로를 살린 기타다.
물론 어쿠스틱은 원목의 빛깔과 나무 결을 그대로 살린 기타 중에서
훨씬 더 좋은 기타를 찾기 쉽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파란색으로 칠을 한 기타를 갖고 싶었다.
마침,
국내 기타제조회사인 \'콜트Cort\'에서, 나만의 이니셜이 새겨진
파란색 기타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나는 그분께 \'정말이냐?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사실이냐?\'고
수도 없이 물었고
너무 좋아 폴짝 폴짝 그자리에서 뛰기도 했고
뱅글뱅글 돌기도 했었다.
나는 \'록시\'에서나 다른 공연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함께 무대에 서면
반드시 그 파란색 기타를 메고
파랑보다 더 싱그럽게 연주하고 노래하리라 마음 먹었다.
.......
그 약속은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이루어졌고
불과 몇 개월 후
나는 걸을 수 없어졌고
휠체어에서만 생활할 수 밖에 없어졌다.
그래서 이미 욕창까지 생겨버린 정도였다.
그리고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열린 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을 빼곤
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파란색 기타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라고 가슴 설레던 그 날.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송국으로 연락이왔다.
그 때 약속했던 기타가 다 만들어졌으니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볼이 아리도록 추운 날.
달마팔자 님(지금은 폐쇄해 버린 길은정 행복카페의 회원 닉네임)이
산타클로스처럼,
여성용으로 작고 예쁜 모양에
금색으로 영문 \'길은정\'이라는 이름을 새긴
파란색 기타를 들고 찾아오신 것이었다.
파란색으로 칠을 했지만
원목의 결을 그대로 살려,
얼마나 이 기타를 만드는데 공을 들였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정작 잊고 있었던
내 이름이 새겨진,
나 만의 파란색 기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기타......
그 기타를 쓰다듬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울음이었다.
잊지않고 나 만의 기타를 만들고 있었던 \'콜트 Cort\' 기타회사 직원들과
달마팔자님의 선의를 생각하니
그 어떤 말로도 고맙다는 표현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기타를 쓰다듬다가 자리를 정리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날을 새도 모를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열린 음악회에 나갔을 때 연주할 수 있었을 걸\'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꺼내보고 또 꺼내보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소리를 내보고 줄을 맞추고....
휠체어에 앉아 기타를 오래 안고 있기에는 무리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랬다..........
그리고 나는 \'길은정의 노래하나 추억 둘 송년특집. 라이브 우체국\'을
생방송으로 진행할 때
그 파란색 기타로 \'호텔 캘리포니아\' 를 연주했다.
기타 폭이 좁아, 휠체어에서 조금 앞으로 자세를 빼어 앉으면
연주할 수 있는 모델이라
나는 내 사랑을 흠뻑 담아 기타 줄을 퉁겼다.
행복한 2시간 동안의 생방송이 순간처럼 흘러갔다.
그렇게 파란색, 내 이름이 새겨진, 나 만의 기타와 나는 하나가 된 듯 했다.
아이처럼 자랑하고 싶어 자꾸만 꺼내어 보고 있다.
이젠 기타를 메고 앉을 무대도 없으면서......
....... 요즘은 책을 읽기도 힘겹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글자를 읽고 쓰기도 어려워졌다.
의사의 말로는
암세포가 내 두뇌로 옮겨가
시신경 어느 부분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은 내 마음과 정신력에 달렸을 뿐,
병원에서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엄청난 말기 암의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몰핀\' 주사를 놓아주고
역시 \'마약류\'로 분류되는 진통제를 처방해 주는 일 뿐이다.
내가 방송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정말 아픈 것 맞냐고 묻는 이도 있는 걸.....
이제 모든 것은 내 정신력에 달려있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도록 노력해야 할텐데.....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기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
.........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파랑색처럼 순수하고 맑으며
천재성이 빛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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