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가의 '마지막 남자'도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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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이아이작성일19-08-23 16:50 조회355,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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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가의 ‘마지막 남자’도 인기
한이 서린 음색에 시원한 가창력이 홍장가의 매력
언니 말이 다 맞아’(김순곤 작사 작곡)에 이어 ‘마지막 남자’(김순곤 작사 김영호 작곡)를 히트시키고 있는 여가수 홍장가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막힌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드는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첫째 매력으로 꼽을 수 있다. 그렇게 시원스런 가창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가요팬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
한이 서린 특유의 음색이 홍장가의 두 번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한국 가요를 부르는 가수에게는 한이 배제된 목소리로는 성공하기 힘들 것처럼 생각되는 게 성인가요계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유연한 창법과 능숙한 무대매너가 세 번째 매력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민요와 가요를 노래하며 오랫동안 쌓은 무대 경력 덕택에 탁월한 가창력을 갖춘 가수가 된 것이다.
취입가수로서 홍장가는 아직도 신인 급이다. 그러나 무대에 오른 경력만 따지면 원로급(?)이라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미 여섯 살 때 군부대 위문공연 무대에 오른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에서 1남6녀의 막내로 태어나 김포에서 자랐다.
부친이 군의관으로 오랫동안 백령도에서 근무한 덕택에 여섯 살 때부터 군부대 공연 무대에 올라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병사들과 백령도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또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가요제작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11세 때 한 콩쿠르에 나가 1등상을 받은 일이 있다. 그 직후 한 연예제작자가 거액의 계약금을 들고 나타나 스타로 키워줄 수 있다며 계약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당시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반대해 어린 홍장가의 가수 데뷔는 이뤄지지 않았다. 어린 딸을 바깥 세상에 섣불리 내보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초등학교와 여고시절 일어난 ‘가수소동’
그녀의 노래솜씨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노래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는 것. 다만 다섯 명에 이르는 언니들이 모두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여고생이 되면서 또 한 번 ‘가수 소동’을 일으켰다. 그녀는 김포여중을 거쳐 김포여고로 진학을 했는데 유명한 작곡가가 학교로 찾아와 교장 선생님에게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줄 테니 가수 활동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이 펄펄 뛰며 그녀의 가수 데뷔를 가로막았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절대 허락해줄 수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면서 그 작곡가를 교장실에서 내쫓은 것.
그러나 홍장가는 여고를 졸업하고도 가수로 나서질 못했다. 학교로 찾아왔던 그 작곡가를 찾아가면 쉽게 가요계에 데뷔할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선영 선생과 이명희 선생 등 유명 국악인들을 쫓아다니며 경기민요를 배웠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경기민요를 가르친 이선영 선생은 홍장가보다 더 늦게 가요를 취입하기도 했다. 국악계의 스승이면서 가요계의 후배가 되는 흥미로운 관계가 형성된 셈이다.
경기민요를 몇 년간 배운 홍장가는 각종 행사 무대에 올라 어린 시절부터 보여준 자신의 노래솜씨를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평가’, ‘창부타령’, ‘노랫가락’ 등 민요들은 물론 ‘알뜰한 당신’, ‘고향역’, ‘카스바의 여인’ 등 인기 가요들도 노래해 박수갈채를 받는 무대전문 가수 겸 행사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것.
홍장가는 특히 말솜씨가 뛰어나 무대에 오르면 남다른 입담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며 MC로도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민요와 가요를 고루 소화해내는 것은 물론 사회까지 볼 수 있으니 행사전용 공연자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셈이다.
행사전용 공연자가 뒤늦게 취입가수로 나선 사연
남다른 재능을 갖춘 홍장가를 눈여겨보던 한 여류 밴드 뮤지션이 그녀에게 함께 활동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이 뮤지션과 함께 전국의 각종 행사 무대에 오르며 홍장가는 자연스럽게 업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을 소상하게 배우게 되었다.
그녀가 가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 행사전용 공연자로 활동하던 그녀는 이 해 경기도가 주최한 <경기도 31개 시군 대항 노래자랑>에 김포 대표로 출전한 일이 있다. ‘수덕사의 여승’과 ‘창부타령’을 불러 대상을 받았다.
홍장가는 이 때 가요계의 대선배인 김용만 선생을 만나게 된다. 노래자랑 수상 기념으로 김용만 선생이 작사 작곡한 ‘경기도 꽃나라’를 부르면서 레코딩 가수로 나서게 된 것.
자신의 악단을 거느리고 각종 행사에 참석하며 노래를 부르던 홍장가는 이 무렵 한 행사장에서 현지의 음향담당자와 크게 다투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수로 무대에 오르긴 하지만 명색이 자신의 악단을 거느린 기획사 사장이기도 한데 음향담당자가 히트곡 하나 없는 무명가수라고 무시하면서 그녀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만 것.
홍장가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행사에 쫓아다니며 돈 버는 일에만 급급해 취입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히트곡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긴 했지만 김용만 선생에게 찾아가 새로 가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2011년 신곡 ‘꿈아 꿈아’ 등을 받아 데뷔 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앨범에는 ‘한강 아리랑’, ‘연꽃 아가씨’, ‘모르고 산 세월’ 등 김용만 작사 작곡의 신곡들이 담겨 있었다.
데뷔 앨범의 출반과 함께 방송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2014년 11월 ‘언니 말이 다 맞아’를 발표하면서 성인가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언니 말이 다 맞아’가 알려지면서 함께 취입한 애절한 창법의 ‘마지막 남자’와 ‘벽창호 사랑’도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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