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박일남의 새 명곡 '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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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이아이작성일22-09-13 16:33 조회130,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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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전설 박일남의 새 명곡 ‘정녕’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발라드
밤하늘의 적막을 깨뜨리듯 고음으로 애처로우면서도 간절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 독주. 곧 이어 저음으로 묵직하게 호소하듯 부르는 가수의 발라드.
살아있는 전설 박일남에게 새로운 명곡 하나가 더 생겼다. 2016년 발표한 ‘정녕’(조운파 작사/임종수 작곡)이 바로 화제의 명곡이게 사랑과 이별의 뜻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노랫말이 아름답다. 가수는 이별의 아픔을 삭이듯 “돌아서는 그대 마지막 눈물에 나는 바람 되어 웁니다”라고 호소력 짙은 창법으로 간절하게 노래한다.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정녕’은 지난 2003년 나훈아가 발표한 곡 ‘분교’(김병걸 작사/임종수 작곡)가 원곡으로 앨범 ‘공’(空)에 수록된 노래였다다.
듣는 사람에. “땡땡땡”하는 학교종소리로 시작되는 특이한 곡이었는데 2010년 조항조가 조운파 선생의 새로운 가사에 피아노 독주로 시작되는 새로운 편곡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두 후배 스타들이 불렀던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운명처럼 마음이 끌려 용감하게 취입을 했다. 나훈아와 조항조가 부른 두 곡은 제목과 가사를 바꿨기 때문인지 전혀 다른 노래가 되었다. 조항조와 박일남의 두 곡도 같은 가사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감기로 피 토한 후 음치 탈출
작곡가 조성준의 감각적인 편곡이 ‘정녕’을 박일남을 위한 맞춤 곡으로 변모시켰다. 전주와 간주를 장식한 문재호의 트럼펫 연주에 더해 피아노까지 직접 연주하며 가수의 노래를 잔잔하게 받쳐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193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일제 때 세무공무원이어서 세 살 때 창원으로 전출돼 전 가족이 부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진주사범에서 미술교사를 하셨다는데 일찍 돌아가셨고 두 동생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마을에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가르치셨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직접 서예까지 배웠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 돌아가시고 말았다.
누굴 닮아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시냐는 물음에 “고등학생 때까지 노래를 전혀 못하는 음치였고 권투만 배웠다”고 대답한다. 고2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 죽을 것 같았다. 자다 말고 피까지 토해 고모들이 “우리 집안의 독자 죽는다”라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탁성의 찢어질 것 같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고 갑자기 노래도 잘 부르게 되었다.
그 때부터 새로 연주법을 익힌 기타를 연주하며 허스키 보이스로 냇 킹 콜의 곡 등 팝송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958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입학해서도 공부는 하지 않았다.
‘갈대의 순정’으로 스타덤 오른 지명수배자
레슬링을 배우러 다니다가 유랑극단에 이끌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랑극단 무대에 서기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1963년 어느 날 킹 박이란 사람이 찾아와 “레코딩을 해볼래?”라고 제안을 했다. 얼결에 취입을 했는데 바로 ‘갈대의 순정’(오민우 작사/작곡)이었다.
킹 박이 어떻게 홍보를 했는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SP레코드 시절이었는데 30만장이 팔렸다. 그해 신인가수상을 받으러 가야하는데 폭력사건으로 수배령이 내려 도망 다니는 처지여서 신인상은 유주용에게 돌아갔다.
레코딩은 꾸준하게 계속돼 1964년 ‘엽서 한 장’(마상원 작사/작곡), 1965년 ‘그리운 희야’(김희갑 작사/작곡)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수배령 때문에 각종 가요상은 배호 등에게 돌아갔다. 박일남은 폭행사건으로 세 번에 걸쳐 형무소에 수감된 경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형무소에서 나온 게 1998년이었다.
1968년 도민증이 주민등록증으로 바뀔 때 박일남의 어머니는 동사무소에 방문해 호적에 당신의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으로 기재된 것을 발견하고 사망처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게 잘못돼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사망처리 되고 막내아들이 살아 있는 것으로 기재되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
연령 제한으로 월남 파병에서 제외
1939년 생 박일남이 1945년 생으로 둔갑한 셈인데 나중에 그게 월남파병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58년 동국대에 입학하기 전 해병대에 입대해 훈련을 받다가 도망친 일이 있다. 나중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해병대 헌병이 나타나 체포되었다.
당시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차중락과 배호를 좋아해 둘을 해병대로 스카우트해 월남에 파병시키면 해병대 홍보에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두 가수 모두 환자여서 고민하던 중 박일남과 남진을 그 대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입소를 며칠 앞두고 맹장이 터져 입원을 했다. 문주란 등이 면회를 와 술을 마시다가 맹장이 다시 터지는 바람에 남진만 먼저 입소하고 박일남은 한 달 뒤 입소했다.
1969년 8월 훈련이 끝나고 자대에서 근무하는데 선임하사가 부르더니 “왜 나이를 속였냐?”면서 닦달 하는 것이었다. 막내 동생과 호적이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노라고 설명하니 30세를 넘으면 월남을 못 간다고 했다. 결국 박일남은 파병에서 제외되었다. 가수로는 혼자만 가게 된 선임 병 남진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요즘에는 나이 때문인지 부르는 곳이 별로 없어서 양로원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푸시업을 2백번 하고, 한 시간 걷기로 건강관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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