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가수 박건, 신곡 '엄지손가락'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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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이아이작성일19-11-21 10:05 조회318,0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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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가수 박건, 신곡 ‘엄지손가락’ 발표
“엄지손가락 펴고 칭찬해주면 모두 행복해져요!”
“오랜만에 신곡을 취입해보니 굉장히 젊어진 느낌입니다. 다시 신인가수가 된 기분으로 해보자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자작 신곡 ‘엄지손가락’을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한 원로가수 박건 선생의 소감이다. 오랫동안 취입하지 않았다는 그의 신곡은 엄지손가락을 사랑의 상징으로 설정해 직접 만든 수작이다.
데뷔시절부터 본격적인 트로트를 노래하지 않고 팝 취향의 발라드 위주로 노래해온 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구수하게 노래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펴 올리며 칭찬을 자주 하다보면 우리 모두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인생철학을 이 노래에 담았다고 말했다.
“뚜루~뚜루~”하고 반복되는 매혹적인 통기타 전주와 함께 나오는 휘파람 소리. 이어서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로 시작되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신명순 작사 김희갑 작곡)은 1971년 나온 가요계의 명곡으로 꼽힌다. 당대의 청춘들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라고 따라 부르며 좋아하던 그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 바로 박건 선생이다.
1940년 전남 함평군 신광면 유천리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울 정도로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홍몽희라는 본명을 갖고 있는 그는 다섯 살 때 놀러온 동네 형들이 가르쳐준 ‘나그네설움’을 잘 불러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4km나 떨어진 국민학교 1,2,3학년을 계속 낙제하고 6.25전쟁도 겪는 바람에 9년 만에 졸업한 그는 그래도 큰 병을 앓지 않고 육군에 입대했다. 5사단 군악대의 가수 겸 서무계로 복무하며 노래만 부르다가 전역을 했다.
손목인 선생에게 노래 배우기 시작
제대 후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는 목포KBS가 주최한 콩쿠르에 출전을 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예선을 거쳐 본선을 끝내고 시상을 하는데 자신보다 노래를 훨씬 못한 참가자들이 모두 상을 받고 자신의 이름은 부르지도 않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집으로 돌아간 그는 서울에 사는 둘째 형님에게 억울한 사연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형님의 답장이 왔다.
1965년 초여름 상경한 그는 당시 상업으로 성공한 둘째 형님의 지원으로 ‘목포의 눈물’ 등을 작곡한 손목인 선생이 가르치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80명이 넘어 개인지도를 받기 어려웠다. 결국 댁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
손목인 선생이 너무 바빠 레슨을 빼먹기 일쑤여서 몇 달 만에 다른 선생들을 찾아 다녔다. 트로트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그에게 바이브레이션을 더 많이 넣으라며 강조하곤 했다.
그 자신은 몸이 약해 바이브레이션이 많은 편인데 더 넣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작곡가 마상원 선생을 만났는데 그 분의 가르침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결국 마상원 선생의 곡 ‘꿈속의 어머니’와 손목인 선생의 ‘장미엔 가시가 있다’라는 곡을 취입하게 되었다. 판이 나왔지만 제대로 방송도 하질 못했다.
속으로 “가수 못하겠으니 편곡이라도 배우자”면서 편곡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함께 노래를 배우러 다니던 곡 잘 쓰던 허현씨가 새로 만들었다는 ‘두 글자’를 받아 1968년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하게 되었다.
첫 인기곡 ‘두 글자’가 히트한 사연
음반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 사장이 그를 부르더니 “너 무슨 빽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촌놈이라 돈도 없고 빽도 없어요”라고 대답했더니 주간중앙의 인기가요 차트를 내밀며 ‘두 글자’가 7위로 새로 진입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동양방송(TBC라디오)에서 집중적으로 틀어 그렇게 빨리 차트의 상위권에 올랐다고 한다. 동양방송의 광고국장 사모님이 한 라디오에서 소개한 ‘두 글자’를 듣다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동양방송에선 나오지 않자 남편에게 “TBC에선 왜 그런 노래가 나오지 않아요?”라고 따지듯 물었다.
다음날 광고국장은 라디오 제작부를 찾아가 ‘두 글자’란 노래가 있느냐고 물으며 음반을 찾아 들어보더니 “괜찮네”라고 중얼거리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이후 PD들이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하고 그 노래를 집중적으로 트는 바람에 졸지에 박건의 ‘두 글자’가 히트하게 되었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이듬해인 1969년 발표한 ‘사랑은 계절 따라’(가람 작사 민인설 작곡)가 크게 히트해 박건은 인기 가수로 발돋움했다. 1971년 ‘청포도 고향’(정진석 작사 작곡)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곡가 김희갑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희갑 선생은 웬 악보를 내밀면서 “이걸 불러보라”고 말했다. 악보를 보니 우리 가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가요라고 생각하며 불렀더니 좋다면서 취입을 하자고 했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에 얽힌 비화
동아방송의 라디오드라마 주제가로 드라마 작가가 쓴 가사라는데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려면 주제가를 히트시켜야 하고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취입시키는데 동아방송의 강수향 음악부장과 안평선 차장이 박건을 추천해 부르게 된 것이다.
녹음을 끝내고 김희갑 선생이 전주와 간주에 넣을 노래의 테마를 휘파람으로 불어줄 사람을 찾았다.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 가수가 나서서 직접 휘파람까지 불게 되었다.
드라마가 시작되고 음반이 나왔지만 ‘사랑은 계절 따라’처럼 빠른 반응은 없었다. 나중에 송창식 김추자 이용복 등도 불렀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2년 반 후인 1973년 그는 MBC TV의 <무궁화 인기가요>란 프로그램에 나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부르기 시작했다. 5개월 동안 토요일마다 나가 그 노래를 부르고 무궁화 다섯 개를 받으면서 난리가 났다.
전주와 간주의 통기타 반주가 관심을 끌어 당시 세고비아 기타가 매진될 정도로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나중에 서울시스터스의 매니저로 유명한 김종민씨가 그의 매니저를 자청해 1974년 KBS 10대 가수상까지 받게 되었다.
이후 숫기가 없던 박건 선생은 신곡 발표는 거의 않고 후배 가수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작곡 활동만 했다. 박일준과 현숙이 그에게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가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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