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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작곡가 고란 브레고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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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
작성일05-05-23 04:49 조회116,6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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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혹시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문이 있어?\"

요즘 즐겨 쓰는 \'썰렁한\' 조크다. 지금 공연계에는 마치 2006년도는 도래하지 않을 것 만큼 엄청나게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메이저 공연장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문 닫고 있는 와중에도 이런 상황일진대, 6월 개관 이후에는 과연 그 많은 공연들을 어떻게 소화해낼지 걱정스럽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 내용물들이 양적인 면 못지 않게 질적으로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특정 성격의 공연이 하나 대박이 나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유사 공연들이 줄을 이었던 과거와는 퍽 다른 현상이다.

또 건전하기도 하다. 다만 그만한 다양성을 한국의 관객이 얼마만큼 균형있게 소화해줄까는 관건으로 남아 있다.

그 다양성의 한 자리를 고란 브레고비치와 \'웨딩 & 퓨너럴\' 밴드가 차지하고 있다(6월 11일 LG아트센터).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 상업광고를 통해 그의 음악은 무방비 상태에서 대중에게 무의식적으로 인지돼 있다.

당장 한 이동통신 광고에서는 그의 \'Ya Ya\'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음악은 지난해 20%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된 한 TV 드라마에도 사용된 적이 있다.

영화 마니아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더욱 친근할 것이다. 피에 물든 이자벨 아자 니의 매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여왕 마고\'를 비롯해 \'집시의 시간\' \'아리조나 드림\' \'언더그라운드\' 등 에밀 쿠스타리차의 역작들의 영음악을 바로 이 사람, 브레고비치가 담당했다.

1950년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세르비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브레고비치의 고향은 사라예보. 지금은 보스니아의 수도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유고슬라비아 영토였다.

철학과 사회학 전공생이었던 브레고비치는 로큰롤에 매료되어 불과 열여섯 나이로 \'비엘료 두그메\'(하얀 버튼)이라는 록 그룹을 창단했다.

당시 공산주의 세계에 대한 정보가 철저히 단절돼 있긴 했지만 동구권에서 \'비엘료 두그메\'는 서구의 비틀스, 딥 퍼플, 마이클 잭슨 만큼의 인기를 구가하던 대단히 인기있는 그룹이었다.

13개의 메이저 앨범을 출시하고 수천 만이 넘는 관객 동원을 경신하며 그가 꿈에도 바라던 아드리안 해 근처에 별장을 구입한 뒤, 과로와 권태에 시달리던 브레고비치는 16년 간의 록그룹 활동을 청산하고 별장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은둔 기간에 그는 일체의 음악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찾아온 인사가다름아닌 에밀 쿠스타리차였다.

고란이 \'비엘료 두그메\'에서 활약하는 동안 한 펑크 그룹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쿠스타리차는 브레고비치를 찾아와 독립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다름아닌 \'집시의 시간\'이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할 만큼 예술적인 성과를 일궜지만 음악은 그보다도 훨씬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집시의 시간\'이 호기심과 은둔에 따른 권태기에서 우러나온 우연의 대작이었다면, 뒤이은 \'아리조나 드림\'과 \'언더그라운드\'는 브레고비치가 필사의 노력을 다해 성공에 매달린 영화라 할 수 있다.

1992년 보스니아전이 시작되자 브레고비치의 재산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은행이 파산했고 그는 무일푼이 되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파리 로 망명, 쿠스타리차와의 영화음악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스크린 뒤에서 음표를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브레고비치는 이어 극예술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라이브 콘서트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 2002년 LG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된 토마스 판두르의 \'단테의 신곡\'에 그의 음악이 사용된 바 있다. 당시 공연을 주최했던 공연장은 음악의 출처와 음원을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묻는 관객의 성화에 한동안 시달리기도 했다.

1995년 처음 결성된 그의 \'웨딩 & 퓨너럴\' 밴드는 합창단까지 수백 명이 동원된 그랜드 오케스트라였다.

로큰롤 시절 특유의 현란하고 우렁찬 복합 사운드를 시도하던 브레고비치의 취향이 점점 심플하고 정갈하게 변화하면서 밴드의 편성도 점점 축소돼 지금은 약 20명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7일 그와 전화인터뷰는 바쁜 일정 속에 잠깐의 틈을 내어 진행됐다. 여전히 수백 회의 콘서트를 소화하고 있는 그는 그 날도 인터뷰를 마치자 마자 투어 공연을 위해 포르투갈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한국 공연을 환영한다. 한국이라든가, 서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가?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음악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상과 음향의 이미지만으로 한국이란 나라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가서 경험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적어도 영화음악 작곡가로 명성이 나 있다. 처음에 영화계에 뛰어든 계기는 역시 쿠스타리차 때문이었는가?

▲그렇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기대 반이었다. 뭔가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쿠스타리차가 찾아와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집시의 시간\'을 작곡할 때까지만 해도 나도 그렇게 오랫 동안 영화음악가로 활동하게 될 준 몰랐다.

하지만 내전이 일어나고 나는 파산했으며 돈이 필요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콘서트는 불가능했다. 생계를 위한 유일한 통로로 영화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치열해지는 법이다.

--\'언더그라운드\' 이후에는 쿠스타리차와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영화 전체를 보아도 \'27 Missing Kisses\'가 마지막 작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이유가 있는가?

▲단편이나 저예산 영화에는 아직도 여전히 관심이 있다. 하지만 대작은 이제 그만이다. 한동안 그만뒀던 라이브 콘서트를 재개하면서 나는 내가 두 가지 일을 한 꺼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도 짓고 그림도 그리고 기계도 발명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르네상스형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음악을 작곡하더라도 결국 그 영화의 원칙적인 주인은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에밀 쿠스타리차나 파트리스 셰로는 굳이 영화음악가의 이름을 내세울 필요가 없을 만큼 유능한 예술가들이다. 그렇다고 니노 로타나 엔니오모리코네처럼 영화감독들과 로맨틱한 관계를 가지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정확하고 살벌해졌다.

--그렇다면 \'단테의 신곡\' 같은 연극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극예술은 그래도 영화보다는 콘서트와 공유하는 바가 더 많다. 공연장이라는 곳에서 실시간으로 소개되는 장르인 것이다. 좀더 인간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토마스 판두르와는 아직도 함께 작업을 하는가?

▲그렇다. 다음달에 마드리드에서 \'단테의 신곡\'이 공연될 예정이다. 그와의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아직 신작 구상은 안하고 있다.

--종전 이후 고향에 가본 적이 있는가?

▲물론이다. 프랑스 여권을 가지고 파리에서 살고 있지만 작업은 주로 베오그라드에서 한다. 콘서트도 여러 차례 가졌다. 올해는 내게 의미있는 해다. 해체된 지 16년 된 \'비엘료 두그메\'의 다른 멤버 셋과 함께 재결성해 동유럽 순회콘서트를 갖는다.

--그룹 이름을 \'비엘료 두그메\'(하얀 버튼)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내가 당시 작곡한 노래 가운데 그 제목의 노래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끌고 있는 \'웨딩 & 퓨너럴\' 밴드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과 가장 슬픈 순간을 상징한다. 보스니아 내전 시절, 나와 나의 지인들은 언제나 이 두 순간이 일시에 겹치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내가 살던 곳에서는 결혼식과 장례식에 동원되는 악단이 그 동네에서 가장 연주를 잘하는 악단이었다.

몇 년 전에 동명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위한 음악\'이란 스웨덴 영화였는데 아들을 잃고 옛 남편이 지어준 집에 살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집 지하실에 세 들어 사는 세르비아 출신 음악가로 출연했다(이 영화는 2002년 선댄스 페스티벌과 2003년 로테르담 영화제에 초청됐다).

--\'웨딩 & 퓨너럴\' 밴드의 일원들은 어떻게 모았는가, 그리고 성격은?

▲루마니아인, 보스니아인, 터키인, 집시들로 구성돼 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만난 인사들이다. 그들 중에는 먼저 찾아온 사람들도 있다.

\'웨딩 & 퓨너럴\'에서 중요한 파트는 브라스다. 아버지가 육군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군악대 연주를 통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 우렁차지만 밝지 않은 사운드는 약하면서도 강한 체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내면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음악을 \'집시음악\'이라 부르는 데에 만족하는가?

▲내 음악은 전통 음악에서 영감을 밭은 현대 음악일 뿐이다. 대다수의 작곡가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사실 나는 \'집시음악\'이라는 데 동의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세자리아 에보라, 오프라 하자, 기요르고스 달라라스, 카야, 세젠 악수 등 자국에서 거의 국민가수 대접을 받는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을 했다. 무척이나 다양한 음악언어와 다양한 국가의 가사가 당신의 음악에 차용된 것이다. 이 또한 당신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작업들인가?

▲호기심도 있지만 상실에서 비롯된 작업이라는 게 옳다. 집시 음악과 집시 언어로 된 가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릴적 사용하던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 언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불어와 영어에 더 익숙하다. 집시 언어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그 안에 슬라브계의 전통이 어느 정도 엿보이기 때문에 익숙해서일 것이다.

--이기 팝과의 영어 작업은 그렇다면?

▲나는 철저하게 상업적이기만 한 인간들과는 상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기 팝은 내게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동료였다. 젊은 시절 내 음악에서 이기팝은 아주 독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 말로 미루어 당신은 국가적인 혹은 민족적인 정체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보스니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지금은 무슬림 (이슬람교 신자) 아내를 두고 파리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달고 태어난 국적은 내전 이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도 정치적인 입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 배부른 입장을 갖기엔 삶이란 것이 너무도 절박했다.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를 갖기에 앞서 사람은 그저 한 개인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빵을 먹어야 하는.

나의 음악은 그런 사람 개인을 위한 음악이다.

--음악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무엇인가?

▲처음 \'비엘료 두그메\' 시절에는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내가 즐거운 음악을 연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음악에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공연을 기다리는 한국 청중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는?

▲나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래를 했다. 이번 한국 콘서트는 지금까지 내가 다녀본 공연 가운데 가장 동쪽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다. 나는 새로운 문화에 호기심이 많다.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법이다. 그런 견지에서 한국 관객도 나의 음악을 즐겨줬으면 좋겠다.


(연합뉴스) 노승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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