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연출 배우고 돌아온 김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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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4-03-11 21:38 조회89,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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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해야 할 공부 9개월 만에 끝냈지만 배울 건 다 배웠습니다.”
오랜만이라 더욱 반가운 얼굴이다. 무대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김장훈은 당초 예정보다 빨리 귀국했다.
UCLA에서 익스텐션 코스를 밟고, 교수들과 장비회사를 찾아다니며 무대연출 기법도 익혔다. 연말 싸이 콘서트를 연출하기도 한 그는 새해 ‘김장훈의 뮤직쇼’를 통해 방송에 복귀한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매력 탐구.
세계 최고의 무대연출가가 되기 위한 희망을 품고
당초 2년 정도 학업에 몰두할 계획이었지만 조기 귀국을 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배울 것은 다 배웠다’며 궁금증이 있을 때마다 교수들을 찾아가 귀찮게 하고 수년 전부터 무대연출에 관심을 가진 것이 학업을 빨리 마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산타모니카 칼리지에서 무대연출을 익히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홀로그램을 제작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첨단 기술을 배웠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대연출 장비회사들을 일일이 다니며 새로운 장비를 찾아다녔다.
“돈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무작정 보여달라고 했죠. 장비 하나의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더라고요. 물론 가격이 저렴하고 꼭 필요한 장비는 구입했어요. 이제는 한번 보면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거의 비슷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노하우로 축적되면 비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 기술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미국에서 링 안전장치를 연구한 그는 공연에서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 날면 안전하고 멋지게 날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연출은 1999년부터 시작해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단골 아이템. 작년 ‘100일 콘서트’ 때에는 하늘을 날다가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도 입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하늘을 나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98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동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1층과 달리 2층에 있는 팬들까지 신경을 쓰기 어려웠다.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다음번에는 2층이 소외되지 않게 해주겠다고 공언을 했다. 그 약속을 하고 정확히 1년 후, 무대 위를 훨훨 날았다. 2층에 있던 팬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잘 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던 사람들도 어느 새 어린 아이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어느 여고생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공연에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났대요.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었는데 자신을 대신해 날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세상을 포기했던 마음에 희망이 생기더래요. 내 작은 행동이 그 학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줬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꼭 그것이 하늘을 나는 것과 관계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예 없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어요. 그때부터 13년간 꾸준히 날았어요.”
공연에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휴머니즘이다. “카레라이스에서 정작 사람들은 카레만 이야기하지 라이스의 중요함은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며 싸이의 말을 빗대는 그는 공연에서 늘 사람들의 모습에 웃음이 끊이지 않기를 희망한단다.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에서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관지 천식으로 병원 신세를 졌던 그는 가수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신 것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여러 번 차압이 들어오면서 가세가 기울어져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세상을 포기하려고 생각도 했지만 음악은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악기를 만지고 노래도 불렀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걸음씩 음악에 다가섰다. 아마도 음악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과 철저히 단절됐던 시절, 음악이야말로 그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물론 지금도 때때로 세상과 등지고 산다. 뉴스도 잘 안 보고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미국 장갑차에 의해 어린 여중생들이 사망한 사건을 접했을 때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월드컵 경기를 할 때는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태극기를 들고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정작 어린 소녀의 꿈이 무참히 짓밟힌 사건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싫었다고.
“100일 공연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죠. 공연을 하던 중간이었지만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 사건을 접하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무작정 의정부로 향했죠. 공연에 늦을 수도 있었지만 팬들이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미군 부대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내 머리가 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죠. 이로 인해 이슈가 된다면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줄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LA의 ‘죽돌이’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학길에 오를 때 사람들은 ‘여기서 대접 잘 받다가 백인들이 텃세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와 걱정의 반응을 보였다. 큰 꿈을 품고 하는 공부이기에 믿고 있는 팬들을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오해받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국인들도 가급적 만나지 않아 외로움은 느꼈지만 그로 인해 음악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평소에 관심 있던 음악들을 미국에서 원없이 들었다.
4월 말, 8집 음반 발매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는 종전과는 다른 음악적인 변신이 있을 것이라고. 앨범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는 음악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와 실험정신에 입각한 음악도 해보겠다고. 따라서 가수는 전속계약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독립하기로 했다.
“가수가 돈과 개입되면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속계약을 통해 음악에만 전념하기를 원했나봐요. 그러나 음반시장에서도 시장원리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음악보다는 잘 팔리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갈등이 있었죠. 이제는 나와 음악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8집은 두 장의 CD로 선보일 계획.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재즈와 각국의 민속악기를 섞어 만든 곡도 포함됐다. 평소에 음악을 듣다가 리모컨에 손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 성향을 철저히 구분했다.
한 장에는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을, 다른 한 장에는 즐길 수 있는 곡을 담았다. 요즘은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어 타격이 크지만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들이고 듣는 게 얼마나 당연한 것인가’라며 제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넓게 보려고 노력한다. 당장은 손해가 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
“지금은 다운받아 들어도 별 차이가 없겠지만 앞으로 가수들도 자성의 시간을 갖고 앨범을 만드는데 노력해야겠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앨범으로 담을 수 있다면 저절로 음반을 구입하려 들 거예요.”
음악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김장훈. 극한적인 슬픔에 치닫게 되었을 때 흘리는 눈물처럼 세상이 정화되길 바란다. 세상과 단절되었을 때 바라본 희망을 다시 찾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희망과 휴머니즘으로 가득찬 세상이 오길 기대해본다.
오랜만이라 더욱 반가운 얼굴이다. 무대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김장훈은 당초 예정보다 빨리 귀국했다.
UCLA에서 익스텐션 코스를 밟고, 교수들과 장비회사를 찾아다니며 무대연출 기법도 익혔다. 연말 싸이 콘서트를 연출하기도 한 그는 새해 ‘김장훈의 뮤직쇼’를 통해 방송에 복귀한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매력 탐구.
세계 최고의 무대연출가가 되기 위한 희망을 품고
당초 2년 정도 학업에 몰두할 계획이었지만 조기 귀국을 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배울 것은 다 배웠다’며 궁금증이 있을 때마다 교수들을 찾아가 귀찮게 하고 수년 전부터 무대연출에 관심을 가진 것이 학업을 빨리 마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산타모니카 칼리지에서 무대연출을 익히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홀로그램을 제작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첨단 기술을 배웠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대연출 장비회사들을 일일이 다니며 새로운 장비를 찾아다녔다.
“돈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무작정 보여달라고 했죠. 장비 하나의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더라고요. 물론 가격이 저렴하고 꼭 필요한 장비는 구입했어요. 이제는 한번 보면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거의 비슷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노하우로 축적되면 비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 기술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미국에서 링 안전장치를 연구한 그는 공연에서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 날면 안전하고 멋지게 날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연출은 1999년부터 시작해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단골 아이템. 작년 ‘100일 콘서트’ 때에는 하늘을 날다가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도 입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하늘을 나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98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동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1층과 달리 2층에 있는 팬들까지 신경을 쓰기 어려웠다.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다음번에는 2층이 소외되지 않게 해주겠다고 공언을 했다. 그 약속을 하고 정확히 1년 후, 무대 위를 훨훨 날았다. 2층에 있던 팬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잘 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던 사람들도 어느 새 어린 아이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어느 여고생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공연에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났대요.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었는데 자신을 대신해 날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세상을 포기했던 마음에 희망이 생기더래요. 내 작은 행동이 그 학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줬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꼭 그것이 하늘을 나는 것과 관계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예 없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어요. 그때부터 13년간 꾸준히 날았어요.”
공연에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휴머니즘이다. “카레라이스에서 정작 사람들은 카레만 이야기하지 라이스의 중요함은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며 싸이의 말을 빗대는 그는 공연에서 늘 사람들의 모습에 웃음이 끊이지 않기를 희망한단다.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에서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관지 천식으로 병원 신세를 졌던 그는 가수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신 것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여러 번 차압이 들어오면서 가세가 기울어져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세상을 포기하려고 생각도 했지만 음악은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악기를 만지고 노래도 불렀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걸음씩 음악에 다가섰다. 아마도 음악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과 철저히 단절됐던 시절, 음악이야말로 그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물론 지금도 때때로 세상과 등지고 산다. 뉴스도 잘 안 보고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미국 장갑차에 의해 어린 여중생들이 사망한 사건을 접했을 때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월드컵 경기를 할 때는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태극기를 들고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정작 어린 소녀의 꿈이 무참히 짓밟힌 사건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싫었다고.
“100일 공연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죠. 공연을 하던 중간이었지만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 사건을 접하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무작정 의정부로 향했죠. 공연에 늦을 수도 있었지만 팬들이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미군 부대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내 머리가 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죠. 이로 인해 이슈가 된다면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줄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LA의 ‘죽돌이’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학길에 오를 때 사람들은 ‘여기서 대접 잘 받다가 백인들이 텃세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와 걱정의 반응을 보였다. 큰 꿈을 품고 하는 공부이기에 믿고 있는 팬들을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오해받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국인들도 가급적 만나지 않아 외로움은 느꼈지만 그로 인해 음악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평소에 관심 있던 음악들을 미국에서 원없이 들었다.
4월 말, 8집 음반 발매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는 종전과는 다른 음악적인 변신이 있을 것이라고. 앨범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는 음악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와 실험정신에 입각한 음악도 해보겠다고. 따라서 가수는 전속계약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독립하기로 했다.
“가수가 돈과 개입되면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속계약을 통해 음악에만 전념하기를 원했나봐요. 그러나 음반시장에서도 시장원리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음악보다는 잘 팔리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갈등이 있었죠. 이제는 나와 음악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8집은 두 장의 CD로 선보일 계획.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재즈와 각국의 민속악기를 섞어 만든 곡도 포함됐다. 평소에 음악을 듣다가 리모컨에 손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 성향을 철저히 구분했다.
한 장에는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을, 다른 한 장에는 즐길 수 있는 곡을 담았다. 요즘은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어 타격이 크지만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들이고 듣는 게 얼마나 당연한 것인가’라며 제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넓게 보려고 노력한다. 당장은 손해가 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
“지금은 다운받아 들어도 별 차이가 없겠지만 앞으로 가수들도 자성의 시간을 갖고 앨범을 만드는데 노력해야겠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앨범으로 담을 수 있다면 저절로 음반을 구입하려 들 거예요.”
음악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김장훈. 극한적인 슬픔에 치닫게 되었을 때 흘리는 눈물처럼 세상이 정화되길 바란다. 세상과 단절되었을 때 바라본 희망을 다시 찾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희망과 휴머니즘으로 가득찬 세상이 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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