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규 당선자 & 가수 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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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4-05-06 09:33 조회87,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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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
김혁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64)와 인기가수 태진아(52).
두 사람은 \'부자의 연\'을 맺고 20년 넘게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사이다.
서로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 부자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오가는 흐뭇한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화창한 봄볕이 쏟아지고 한강 둔치의 화사한 유채꽃 물결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서울 동부이촌동 태진아의 아파트.
양아버지의 도착 시간이 다가오자 태진아는 마냥 설레는 표정이었다.
쉰을 넘긴 나이에 큰아들까지 장가보낸 \'트로트의 제왕\'이 이날만큼은 완전히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 전날 양말을 걸어놓고 산타클로스의 방문을 기다리는 아이의 표정이 저럴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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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만남은 김혁규 당선자가 바쁜 일정에도 태진아의 방문 요청을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날 태진아는 23년 동안 친아버지 이상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김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부산 공연 도중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태진아는 김 당선자를 만나자 널찍한 아파트의 거실 한편에 장식된 각종 트로피와 훈장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아버지, 이건 지금까지 제가 받았던 트로피들이에요. 또 저것들은 대통령 세 분께 받았던 훈장들이고요.\" \"야, 너 혼자서 상 다 받으면 어떡하냐.\" 태진아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 뿌듯한 일을 해 놓고는 보란듯이 부모에게 자랑하는 아이 같았고, 김 당선자 역시 아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운지 시종일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8살의 태진아는 빈 손으로 도미,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서 좌판을 놓고 힙겹게 생계를 꾸려가던 처지.
청소보조원, 접시닦이 등 이민자들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궂은 일은 다 겪은 뒤였다. 인기 가수로 명성을 날리며 화려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 도미 후 3개월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소에도 가지 못했다.
\"당시 세계 관광객들이 다 다닌다는 맨해튼에 좌판을 펴고 2, 3불짜리 라이터나 \'아이 러브 뉴욕\'이 새겨진 기념품들을 팔았어요. 그래도 얼굴이 알려진 터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라이터 하나에 5불도 내고 10불짜리도 놓고 가셨죠.\"
사업으로 성공해 초대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 당선자가 이런 태진아의 얘기를 접한 것은 교민 신문을 통해서이다.
\"태진아의 기사가 교민 신문에 자주 나오길래 궁금해서 한번 가봤지. 힘들지만 밝고 꾸밈없는 모습이 좋아서 명함 하나 줬어. 나도 바닥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 뭐든지 도와주고 싶었어.\" 명함을 인연으로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이 그해 9월께. 이후 태진아는 김 당선자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가방 장사로 업종을 바꿔 대성공, 인생의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두 사람은 결국 82년 말에 양부모와 양아들이 되기로 마음을 모았다.
2년여의 동거생활을 접고 이옥형 씨와 결혼식을 올린 것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김 당선자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태진아 큰 아들(조유명.뉴욕 NYU 호텔 경영학과)의 고교.대학의 학비까지 다 대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 당선자는 부부의 결혼식을 자신의 비용으로 치러주며 패물까지도 직접 마련해 줬다.
두 사람의 관계는 88년 태진아가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재기를 준비하는 기간에 잠시 소원해졌다. 태진아로서는 집안 형편이 다시 악화된데다 재기를 준비하던 한국에서의 생활도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
잠시 끊어졌던 두 사람 사이의 끈은 90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비서관으로 한국에 돌아온 김 당선자가 먼저 전화를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김 당선자는 이후 재기에 힘쓰던 태진아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태진아가 외동딸밖에는 없는 김 당선자의 친아들 역할을 할 정도로 각별한 부자 사이가 됐다.
93년 경남 도지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김 당선자가 95년 민선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자 태진아는 한달 가까이 모든 일정을 접고 유세장을 쫓아다녔다.
김 당선자의 생일에는 하와이나 일본 공연 중에도 전화로 항상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드렸을 정도.
김 당선자는 \"민선 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나보다 태진아가 더 인기가 좋았어. 순발력도 있고 재치도 있고. 태진아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며 \"태진아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줄 알아. 지난해 히로시마 공연에서 얻은 1억원의 수익금을 대구지하철 참사에 낼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고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태진아도 \"아버지 없이는 오늘날 제가 있을 수 없었어요. 저를 성공시키셨듯 앞으로 우리 국민들 모두를 잘 살게 해주실 겁니다\"라며 아버지에게 한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 \'동반자\'를 선물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당신과 만남이었어….\' 한참 뜨고 있는 동반자의 가사처럼 \'아름다운 상생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마음 속으로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김혁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64)와 인기가수 태진아(52).
두 사람은 \'부자의 연\'을 맺고 20년 넘게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사이다.
서로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 부자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오가는 흐뭇한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화창한 봄볕이 쏟아지고 한강 둔치의 화사한 유채꽃 물결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서울 동부이촌동 태진아의 아파트.
양아버지의 도착 시간이 다가오자 태진아는 마냥 설레는 표정이었다.
쉰을 넘긴 나이에 큰아들까지 장가보낸 \'트로트의 제왕\'이 이날만큼은 완전히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 전날 양말을 걸어놓고 산타클로스의 방문을 기다리는 아이의 표정이 저럴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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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만남은 김혁규 당선자가 바쁜 일정에도 태진아의 방문 요청을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날 태진아는 23년 동안 친아버지 이상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김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부산 공연 도중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태진아는 김 당선자를 만나자 널찍한 아파트의 거실 한편에 장식된 각종 트로피와 훈장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아버지, 이건 지금까지 제가 받았던 트로피들이에요. 또 저것들은 대통령 세 분께 받았던 훈장들이고요.\" \"야, 너 혼자서 상 다 받으면 어떡하냐.\" 태진아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 뿌듯한 일을 해 놓고는 보란듯이 부모에게 자랑하는 아이 같았고, 김 당선자 역시 아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운지 시종일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8살의 태진아는 빈 손으로 도미,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서 좌판을 놓고 힙겹게 생계를 꾸려가던 처지.
청소보조원, 접시닦이 등 이민자들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궂은 일은 다 겪은 뒤였다. 인기 가수로 명성을 날리며 화려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 도미 후 3개월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소에도 가지 못했다.
\"당시 세계 관광객들이 다 다닌다는 맨해튼에 좌판을 펴고 2, 3불짜리 라이터나 \'아이 러브 뉴욕\'이 새겨진 기념품들을 팔았어요. 그래도 얼굴이 알려진 터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라이터 하나에 5불도 내고 10불짜리도 놓고 가셨죠.\"
사업으로 성공해 초대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 당선자가 이런 태진아의 얘기를 접한 것은 교민 신문을 통해서이다.
\"태진아의 기사가 교민 신문에 자주 나오길래 궁금해서 한번 가봤지. 힘들지만 밝고 꾸밈없는 모습이 좋아서 명함 하나 줬어. 나도 바닥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 뭐든지 도와주고 싶었어.\" 명함을 인연으로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이 그해 9월께. 이후 태진아는 김 당선자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가방 장사로 업종을 바꿔 대성공, 인생의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두 사람은 결국 82년 말에 양부모와 양아들이 되기로 마음을 모았다.
2년여의 동거생활을 접고 이옥형 씨와 결혼식을 올린 것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김 당선자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태진아 큰 아들(조유명.뉴욕 NYU 호텔 경영학과)의 고교.대학의 학비까지 다 대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 당선자는 부부의 결혼식을 자신의 비용으로 치러주며 패물까지도 직접 마련해 줬다.
두 사람의 관계는 88년 태진아가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재기를 준비하는 기간에 잠시 소원해졌다. 태진아로서는 집안 형편이 다시 악화된데다 재기를 준비하던 한국에서의 생활도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
잠시 끊어졌던 두 사람 사이의 끈은 90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비서관으로 한국에 돌아온 김 당선자가 먼저 전화를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김 당선자는 이후 재기에 힘쓰던 태진아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태진아가 외동딸밖에는 없는 김 당선자의 친아들 역할을 할 정도로 각별한 부자 사이가 됐다.
93년 경남 도지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김 당선자가 95년 민선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자 태진아는 한달 가까이 모든 일정을 접고 유세장을 쫓아다녔다.
김 당선자의 생일에는 하와이나 일본 공연 중에도 전화로 항상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드렸을 정도.
김 당선자는 \"민선 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나보다 태진아가 더 인기가 좋았어. 순발력도 있고 재치도 있고. 태진아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며 \"태진아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줄 알아. 지난해 히로시마 공연에서 얻은 1억원의 수익금을 대구지하철 참사에 낼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고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태진아도 \"아버지 없이는 오늘날 제가 있을 수 없었어요. 저를 성공시키셨듯 앞으로 우리 국민들 모두를 잘 살게 해주실 겁니다\"라며 아버지에게 한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 \'동반자\'를 선물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당신과 만남이었어….\' 한참 뜨고 있는 동반자의 가사처럼 \'아름다운 상생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마음 속으로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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