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이류 - 서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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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4-03-24 20:11 조회83,6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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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환갑에 새 음반을 낼 수 있는 가수는 몇 명이나 될까.
신곡을 부르는 1943년생 현역 가수.
서수남은 현재 TV 오락프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예인 중 한명이다.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운동과 음식으로 자신을 비유한다. \"배구로 치자면 토스, 음식으로 말하면 소스 역할이죠.\" 실제로 그는 프로그램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요긴한 존재다.
PD들은 분장실이나 연습실에서 후배 출연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넉넉함에 안도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벗 삼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기타 치며 \'러브 미 텐더\'를 노래하는 모습을 무작정 따라했다.
한양대 화학과 2학년이던 1962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MBC 라디오콩쿠르에서 자니 브라더스가 대상을 받을 때 그는 금상을 받았다.
기타를 연주하며 \'오 론섬 미\'(Oh lonesome me)를 불렀는데 상을 받자 낯선 젊은이 세 명이 무대 뒤로 찾아왔다.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최응삼, 나중에 KBS PD가 된 박창학, 그리고 그와는 음악 인생의 동반자가 될 운명의 하청일이었다.
그들은 콰르텟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브러더스 포, 에브리 브러더스 등 4인조 밴드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때였다.
이래서 탄생한 게 아리랑 브라더스다.
64년에 첫 앨범을 냈다.
그가 작사한 불후의 명곡 \'동물농장\'이 들어 있는 음반이다.
아리랑 브라더스는 고개를 넘지 못했다. 워커힐 가야금홀에서 오디션을 하는데 그가 잘렸기 때문이다.
오디오보다는 비디오가 문제였다. \"키 187㎝에 몸무게 65㎏이었으니까.\" 그러나 음악을 포기할 순 없었다. 명동의 뒷골목을 누비며 팝송을 소개하는 잡지들을 매주 구입했다.
드디어 컨트리음악을 무기로 미8군 무대에 진출한다.
거기서 만난 조영남의 소개로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하다가 성우 출신의 현혜정과 남녀 듀엣을 조직한다. \'
정말로 너무해\'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음반 한 장을 내고 팀은 해체된다.
69년 그 빈 자리에 \'드디어\' 하청일이 들어왔다.
서수남.하청일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와는 모두 11장의 앨범을 낸다. 번안가요 대부분의 작사.편곡.연주를 본인이 도맡았다. \'벙글벙글\' \'팔도유람\' 등 생활밀착형 대중가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명성에 비해 수입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88년 가을 하청일은 부업으로 스포츠용품점을 낸다. 사업이 잘 되니까 서로의 길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서수남 역시 사업에 뛰어든다. 업종은 음악학원. 기타교실과 노래교실이었다.
뜻밖에도 대박이었다. 노래 지도에 특유의 재담을 곁들이니 주부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가는 곳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난리가 났다. 비로소 돈도 그의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대접 받고 수입 늘고.\" 그러나 그의 인생은 쇼보다 드라마에 가까웠다.
애국가의 일부가 가요에 녹아 있는 실험적인 신곡 \'신명가\'(작사 홍광식.서수남, 작곡 서수남)에는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뜬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내가 종이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하는 사건.
빛과 빚은 점 하나 차이다.
그가 빛에 눈부셔 하던 그때 아내는 빚에 눈멀어 있었다.
2000년 10월 어느 날.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그는 긴 시간 고민했다.
무너질 것인가, 무뎌질 것인가. 결국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오르기로 결심한다.
이듬해부터 매년 콘서트를 열었다. 먹으면서 듣는 디너쇼가 아니라 정식 콘서트다. 빚은 서서히 빛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가 뿌린 노래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신곡도 냈다. \'신명가\'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음속의 레벌루션\'이다. \"내가 혁명하지 않으면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만년 청년인 그에게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즐겁게 일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킨다. 그의 노래 인생은 하청일과 20년, 노래교실과 12년으로 요약된다. \"시련이 오히려 멋있게 클 수 있는 계기가 되더라.\" 그와 이야기하다 보니 키만 큰 게 아니라 마음이 큰 사람임을 알게 된다.
지금 그는 예원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서 1주일에 2시간씩 수업한다. 그가 40년도 더 아래인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보컬의 \'앙상블\'이다. 저마다 튀려고 혈안이 된 세상풍경 속에서 토스와 소스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가 한 뼘은 족히 커 보인다.
신곡을 부르는 1943년생 현역 가수.
서수남은 현재 TV 오락프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예인 중 한명이다.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운동과 음식으로 자신을 비유한다. \"배구로 치자면 토스, 음식으로 말하면 소스 역할이죠.\" 실제로 그는 프로그램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요긴한 존재다.
PD들은 분장실이나 연습실에서 후배 출연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넉넉함에 안도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벗 삼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기타 치며 \'러브 미 텐더\'를 노래하는 모습을 무작정 따라했다.
한양대 화학과 2학년이던 1962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MBC 라디오콩쿠르에서 자니 브라더스가 대상을 받을 때 그는 금상을 받았다.
기타를 연주하며 \'오 론섬 미\'(Oh lonesome me)를 불렀는데 상을 받자 낯선 젊은이 세 명이 무대 뒤로 찾아왔다.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최응삼, 나중에 KBS PD가 된 박창학, 그리고 그와는 음악 인생의 동반자가 될 운명의 하청일이었다.
그들은 콰르텟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브러더스 포, 에브리 브러더스 등 4인조 밴드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때였다.
이래서 탄생한 게 아리랑 브라더스다.
64년에 첫 앨범을 냈다.
그가 작사한 불후의 명곡 \'동물농장\'이 들어 있는 음반이다.
아리랑 브라더스는 고개를 넘지 못했다. 워커힐 가야금홀에서 오디션을 하는데 그가 잘렸기 때문이다.
오디오보다는 비디오가 문제였다. \"키 187㎝에 몸무게 65㎏이었으니까.\" 그러나 음악을 포기할 순 없었다. 명동의 뒷골목을 누비며 팝송을 소개하는 잡지들을 매주 구입했다.
드디어 컨트리음악을 무기로 미8군 무대에 진출한다.
거기서 만난 조영남의 소개로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하다가 성우 출신의 현혜정과 남녀 듀엣을 조직한다. \'
정말로 너무해\'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음반 한 장을 내고 팀은 해체된다.
69년 그 빈 자리에 \'드디어\' 하청일이 들어왔다.
서수남.하청일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와는 모두 11장의 앨범을 낸다. 번안가요 대부분의 작사.편곡.연주를 본인이 도맡았다. \'벙글벙글\' \'팔도유람\' 등 생활밀착형 대중가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명성에 비해 수입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88년 가을 하청일은 부업으로 스포츠용품점을 낸다. 사업이 잘 되니까 서로의 길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서수남 역시 사업에 뛰어든다. 업종은 음악학원. 기타교실과 노래교실이었다.
뜻밖에도 대박이었다. 노래 지도에 특유의 재담을 곁들이니 주부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가는 곳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난리가 났다. 비로소 돈도 그의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대접 받고 수입 늘고.\" 그러나 그의 인생은 쇼보다 드라마에 가까웠다.
애국가의 일부가 가요에 녹아 있는 실험적인 신곡 \'신명가\'(작사 홍광식.서수남, 작곡 서수남)에는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뜬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내가 종이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하는 사건.
빛과 빚은 점 하나 차이다.
그가 빛에 눈부셔 하던 그때 아내는 빚에 눈멀어 있었다.
2000년 10월 어느 날.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그는 긴 시간 고민했다.
무너질 것인가, 무뎌질 것인가. 결국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오르기로 결심한다.
이듬해부터 매년 콘서트를 열었다. 먹으면서 듣는 디너쇼가 아니라 정식 콘서트다. 빚은 서서히 빛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가 뿌린 노래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신곡도 냈다. \'신명가\'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음속의 레벌루션\'이다. \"내가 혁명하지 않으면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만년 청년인 그에게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즐겁게 일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킨다. 그의 노래 인생은 하청일과 20년, 노래교실과 12년으로 요약된다. \"시련이 오히려 멋있게 클 수 있는 계기가 되더라.\" 그와 이야기하다 보니 키만 큰 게 아니라 마음이 큰 사람임을 알게 된다.
지금 그는 예원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서 1주일에 2시간씩 수업한다. 그가 40년도 더 아래인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보컬의 \'앙상블\'이다. 저마다 튀려고 혈안이 된 세상풍경 속에서 토스와 소스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가 한 뼘은 족히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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