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에서 로커로 변신한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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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5-05-27 10:56 조회97,0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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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낯설다.
그는 야구팬들에게 영원한 갈기머리 좌완투수 이상훈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야구장이 아닌 록 밴드를 선택한 그의 변신이 신선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공연을 직접 본 후, 그의 변신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료 선수들 앞에서 기타 연주하며 열창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굴렀던 선수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잘나가던 투수였던 동료가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에서 기타를 메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과, 무대 밑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야구선수들. 이 묘한 풍경을 만든 것은 그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지난 12월 7일 열렸던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현장. 배영수, 이종범, 김기태, 최희섭, 송진우, 선동렬 감독, 김응룡 사장 등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 대신 말쑥한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모습들이었다. 2004년 프로야구를 결산하는 자리인만큼 소속팀과 상관없이 반갑게 인사하고 웃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선수와 감독이 아닌 로커 이상훈이었다.
그가 검은 가죽 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기타를 메고 축하 무대에 올라오자 시상식장은 순간 짧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어떤 이는 그의 변신에 당황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을 것이다. 이상훈은 말문을 열었다.
“저도 예전에 수상자로 한두번 참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배님들, 동료, 후배들이 많이 계시네요. 제가 기타를 들고 나타난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요. 감독님들도 계시는데….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소회를 짧게 이야기하고 기타 연주에 들어갔다. 록 그룹 콜렉티브 솔의 ‘헤비’를 연주하면서 열창하기 시작했다. 야구선수 이상훈이 아닌 로커 이상훈으로 변한 것이 ‘최선’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한 곡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클럽에서는 젊은이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을 텐데,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무대는 야구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누구도 선뜻 그의 노래에 헤드뱅잉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 힘들었을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많은 동료들이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묻고 덕담을 건넸다. 긴장했던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해 짧게 심경을 내비쳤다.
“야구보다 기타가 좋냐는 물음은 너무 극단적인 질문입니다.(웃음) 지금 선후배들처럼 저도 야구할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음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야구장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는 로커로의 변신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주저함이 없다. 방송 섭외나 인터뷰 요청도 거의 거절하고 있다. 음악인 이상훈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멤버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있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곡 작업도 함께 병행중이다. 자신의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에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상격을 알고 있는 이종범 선수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반갑습니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덕담을 건넸다.
야구계의 이단아(?), 그의 실력 아쉬워하는 사람 많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용모 단정한 야구선수들 속에서 그는 항상 ‘튀는’ 존재였다. 갈기머리를 휘날리면서 공을 뿌릴 때면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뛰어난 좌완투수로 한국 야구사에서 인정받는 투수였다.
1993년 LG트윈스에 입단, 이듬해 팀의 우승과 함께 명투수 반열에 올랐다.
1995년에는 20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척추 부상 때문에 마무리 투수로 전환했다. 1997년에 구원왕에 오른 뒤, 그는 홀연 한국 무대를 떠난다.
19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이종범, 선동렬과 함께 일본에 한국 야구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메이저리그 보스턴레스삭스에 입단했다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2002년 LG트윈스로 컴백한다. LG트윈스의 팬들은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짧은 시간 동안 한국, 일본, 미국의 야구를 모두 경험한 것은 이상훈이 최초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그는 점점 쇠퇴해갔다.
그러다 ‘기타 파동’이 터진다. 2004년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순철 신임감독과 갈등이 불거진 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지 말라”는 감독의 말에 “개성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맞섰다.
그는 고향 같은 LG트윈스를 떠나 SK와이번스로 이적했지만, 2군으로 추락한다. 그의 자존심이 부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가 아직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말렸지만, 잔여 연봉 3억원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이 록 밴드 ‘왓(What)’을 만들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이상훈이 팬클럽 모임에서 노래 부를 때 자주 어울려서 공연하던 사람들이다. 신동현(드럼), 차상현(베이스), 임성한(기타)이 왓의 멤버들이다. 신동현씨와 이상훈이 만난 지는 벌써 7년째라고 한다. 왓은 얼터너티브 록을 하는 밴드다.
이상훈의 변신에 많은 사람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다. 이상훈 자신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커로서 인정받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는 쉽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곡 작업과 연주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상훈.
앨범 발매와 구체적인 공연 소식은 아직 없다. 그를 무대에서 다시 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보여준 개성 강한 야생마의 모습처럼, 무대에서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로커로의 변신이 성공하기를 기대해본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최병준
그는 야구팬들에게 영원한 갈기머리 좌완투수 이상훈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야구장이 아닌 록 밴드를 선택한 그의 변신이 신선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공연을 직접 본 후, 그의 변신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료 선수들 앞에서 기타 연주하며 열창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굴렀던 선수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잘나가던 투수였던 동료가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에서 기타를 메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과, 무대 밑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야구선수들. 이 묘한 풍경을 만든 것은 그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지난 12월 7일 열렸던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현장. 배영수, 이종범, 김기태, 최희섭, 송진우, 선동렬 감독, 김응룡 사장 등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 대신 말쑥한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모습들이었다. 2004년 프로야구를 결산하는 자리인만큼 소속팀과 상관없이 반갑게 인사하고 웃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선수와 감독이 아닌 로커 이상훈이었다.
그가 검은 가죽 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기타를 메고 축하 무대에 올라오자 시상식장은 순간 짧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어떤 이는 그의 변신에 당황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을 것이다. 이상훈은 말문을 열었다.
“저도 예전에 수상자로 한두번 참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배님들, 동료, 후배들이 많이 계시네요. 제가 기타를 들고 나타난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요. 감독님들도 계시는데….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소회를 짧게 이야기하고 기타 연주에 들어갔다. 록 그룹 콜렉티브 솔의 ‘헤비’를 연주하면서 열창하기 시작했다. 야구선수 이상훈이 아닌 로커 이상훈으로 변한 것이 ‘최선’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한 곡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클럽에서는 젊은이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을 텐데,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무대는 야구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누구도 선뜻 그의 노래에 헤드뱅잉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 힘들었을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많은 동료들이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묻고 덕담을 건넸다. 긴장했던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해 짧게 심경을 내비쳤다.
“야구보다 기타가 좋냐는 물음은 너무 극단적인 질문입니다.(웃음) 지금 선후배들처럼 저도 야구할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음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야구장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는 로커로의 변신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주저함이 없다. 방송 섭외나 인터뷰 요청도 거의 거절하고 있다. 음악인 이상훈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멤버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있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곡 작업도 함께 병행중이다. 자신의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에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상격을 알고 있는 이종범 선수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반갑습니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덕담을 건넸다.
야구계의 이단아(?), 그의 실력 아쉬워하는 사람 많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용모 단정한 야구선수들 속에서 그는 항상 ‘튀는’ 존재였다. 갈기머리를 휘날리면서 공을 뿌릴 때면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뛰어난 좌완투수로 한국 야구사에서 인정받는 투수였다.
1993년 LG트윈스에 입단, 이듬해 팀의 우승과 함께 명투수 반열에 올랐다.
1995년에는 20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척추 부상 때문에 마무리 투수로 전환했다. 1997년에 구원왕에 오른 뒤, 그는 홀연 한국 무대를 떠난다.
19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이종범, 선동렬과 함께 일본에 한국 야구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메이저리그 보스턴레스삭스에 입단했다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2002년 LG트윈스로 컴백한다. LG트윈스의 팬들은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짧은 시간 동안 한국, 일본, 미국의 야구를 모두 경험한 것은 이상훈이 최초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그는 점점 쇠퇴해갔다.
그러다 ‘기타 파동’이 터진다. 2004년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순철 신임감독과 갈등이 불거진 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지 말라”는 감독의 말에 “개성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맞섰다.
그는 고향 같은 LG트윈스를 떠나 SK와이번스로 이적했지만, 2군으로 추락한다. 그의 자존심이 부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가 아직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말렸지만, 잔여 연봉 3억원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이 록 밴드 ‘왓(What)’을 만들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이상훈이 팬클럽 모임에서 노래 부를 때 자주 어울려서 공연하던 사람들이다. 신동현(드럼), 차상현(베이스), 임성한(기타)이 왓의 멤버들이다. 신동현씨와 이상훈이 만난 지는 벌써 7년째라고 한다. 왓은 얼터너티브 록을 하는 밴드다.
이상훈의 변신에 많은 사람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다. 이상훈 자신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커로서 인정받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는 쉽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곡 작업과 연주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상훈.
앨범 발매와 구체적인 공연 소식은 아직 없다. 그를 무대에서 다시 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보여준 개성 강한 야생마의 모습처럼, 무대에서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로커로의 변신이 성공하기를 기대해본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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