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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에 7집앨범 ‘길’발표한 한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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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
작성일05-09-23 14:13 조회128,1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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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좋은 개살구’ 인생. 제대로 내 길을 걸어오긴 한 걸까. 뒤돌아보며 아쉬워한들 무엇할까. 살아온 길 위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나. 내가 지나온 길이면 진짜 나의 것이지….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송대관이도 노래하지 않았나.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다고.’ 마지막 심지를 태우는 심정으로 만들었다. 한 장의 트로트 음반 ‘길’. 까짓, 세상이 몰라주면 어떠랴. 구성진 노래로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련다.

무명의 세월
무명가수 한명호씨(59). 30여년 전 음반 ‘웃으며 살리라’를 시작으로 6집까지 발표한 원로 가수다. 그러나 이름과 노래를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탁 트인 구성진 음성에 감정 풍부한 노래로 가수들 사이에선 ‘진짜 가수’로 통하지만 대중은 몰랐다.

운도 안따랐다. 남북이산가족 만남에 맞춰 ‘비내리는 판문점’(1980년)을 발표했다. 슬슬 방송을 타는가 싶더니 몇 달 후 설운도가 나타나 ‘잃어버린 30년’을 노래하는 통에 찬밥 신세가 됐다.

이름 탓인가 싶어 예명도 자주 바꿨다. 희고 멀쩡하게 잘 생긴 탤런트 한진이가 등장했을 때 ‘한진이’란 예명을 썼다. 줄줄이 바꾼 예명 한민, 예성아, 한진이, 백영민…. 한민이란 이름을 짓자 신인가수 한민이 ‘나는 가련다’ 노래로 먼저 매스컴을 탔다.

“가수 (임)희숙이가 그러대요. 오빠는 이름만 계속 바꾸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라고요. 어쩝니까. 잘해보려고 그랬던 건데.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잖아요.”

93년 7월 한때 무명의 그림자가 거둬지는 듯도 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신나는 세태 풍자곡 ‘가지가지’가 프로 야구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야구팬들은 가수 이름도, 노래 제목도 모른 채 장내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를 사랑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야구시즌이 끝나면서 노래도 차츰 잊혀갔다.

“수만 명이 내 노래를 흥얼대니 그땐 신났죠. 땡볕에 경기장에 서서 목이 터져라 노래도 참 많이 불렀는데, 그런데 그걸로 그만이더라고요. 왜 그렇게 안 풀리는지…”

스무살 때 녹음까지 마친 1집 ‘까치고개’는 사기를 당해 결국 음반을 내지 못했다. 2집 ‘웃으며 살리라’, 3집 ‘비내리는 판문점’, 4집 ‘당신은 떠나도’, 5집 ‘잃어버린 마음’, 6집 ‘가지가지’까지 그렇게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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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를 꿈 꾼 깡패

그러나 세월과 함께 마음을 비웠다. 그 때문일까. 직접 작사·작곡한 신곡 ‘길’(7집 음반)이 내 살점처럼 아프고 소중하다. 어릴 적 동무 이인영씨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혀버렸을 노래. 한 많은 인생이 가사와 구슬픈 곡에 녹아있는 ‘내 안의 명작’. 이 노래로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 텅 빈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

상처 난 영혼이 어디 한 둘이랴. 몇년 전부터 후배 가수 서육남씨(58)와 보육원, 장애인 보호시설, 노인정 등을 다니며 노래 봉사한다. 한(恨) 맺힌 가슴으로 노래하니 더 구성질 수밖에. 어딜 가든 박수가 넘쳐난다.

계속되는 좌절에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운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뜨거운 피가 흘렀다. 아버지 한계룡씨는 ‘뜸북새 사랑’ ‘기러기 안부’ 등의 노래로 유명한 가수였다. 어머니 김정순씨(예명 백년화)는 인기 악극배우였다. 아버지는 해방 후 동대문시장 상인회장으로 재력과 ‘주먹’을 가졌다. 이정재, 임화수 등이 한씨 집에서 기거했다.

6·25가 터진 후 당시 좌익계 악극 단장이었던 큰 아버지 한명룡씨에 의해 아버지가 강제 납북됐다. 두명의 형제와 누나도 전쟁 통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열살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졸지에 고아가 됐어요. 고모네 얹혀 살았는데 사촌형 구박이 심했죠. 재동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방과 후 (이)정재 삼촌 종로 사무실로 매일 놀러갔어요. 주먹 소굴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죠.”

노래 솜씨는 진작에 발휘했다. 초등학교 시절 ‘봄날은 간다’ ‘산장의 여인’ ‘꿈에 본 내고향’을 부르면 옆반 교사들까지 모였다. 노래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엄마였고 친구였다. 고모네에서 가출한 10대 후반엔 불량 청소년을 수용해 교화하는 ‘희망소년관’에서 살았다.

“말이 교육관이지 감옥이었죠. 친구들과 탈출해 명동, 종로를 휘젓고 다니며 깡패 노릇을 했어요. 태권도, 권투, 중국무술도 익혔겠다 두려울 게 없었으니까요. 못된 짓은 하고 다녔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꿈만은 한순간도 버린 적이 없어요.”

끝나지 않은 노래

han.jpg\"align=\'left\'노래할 밑천을 만들려고 이것저것 사업에도 손댔다. 노래에서 못다한 한풀이로 성공하고 싶었다. 금은방, 유흥업소, 화원, 자동차 엔진 부품사, CD노래방기기 제조사…. CD노래방기기는 컴퓨터칩이 나오면서 막대한 투자비만 날렸다. 영화제작사를 운영하며 영화 ‘너에게 받은 흔적’(1994년)도 만들었다. 한때는 수십억원의 돈을 벌었고, 단돈 1만원이 아쉬운 적도 있었다.

친구들 사이엔 의리의 사나이. 사정이 딱한 후배가 있으면 아내의 금가락지를 빼서 도울 정도였다. 77년 결혼 무렵에는 ‘작은 알리’라고 불린 고아출신의 혼혈아 권투선수 나대성을 뒷바라지했다.

“나대성이를 신혼집에 같이 살려고 데려가니까 아내가 기가 막혀 말을 못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아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게 잘못이죠. 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노래, 일, 친구만 생각했던 게 후회됩니다. 실패한 인생 같기도 하고요.”

아내는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이젠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소설가 신동화씨는 지금 한씨의 이야기를 한편의 소설로 엮고 있다. 실패한 인생에도 찬란한 꽃을 피웠던 때는 있었을 것이니.

“그래도 나에겐 노래가 남아 있잖아요. 내 노래를 들으면서 울고 웃는 사람들도 있고요. 어찌 보면 지금이 내 인생의 찬란한 때가 아닐까요.”

중견 가수의 노래는 아직 ‘길’ 위에서 끝나지 않았다.


〈글 김희연기자 eggh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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